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니엘 오르테가 (문단 편집) === 야당 생활 === 1990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로는 의외로 야당의 입장에 충실하였다. 일부 산디니스타 당원들과 농민들이 베올리타 차모로 정권을 뒤엎을 시도를 했지만 어차피 혁명이 성공해봐야 이미지가 안 좋아질게 뻔하고 실패하면 나가리인지라 혁명 시도를 막았다고 전해진다. 차모로 정권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동생이 지속해서 니카라과 군의 사령관으로 재직하게 만들게함으로써 산디니스타가 우파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오르테가는 차모로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예상보다 덜 받으면서 재기가 가까워 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1996년 대선에서는 여론조사에서 콘트라 출신인 알레만 후보에게 내내 우세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알레만 후보가 과반의 득표율로 당선이 되었고 오르테가는 쓴 맛을 봐야 했다. 1998년에 성추행 스캔들이 펼쳐지면서 다니엘 오르테가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것도 보통 스캔들도 아니고 무려 자기 의붓딸을 집적거렸다는 '''근친 성범죄''' 의혹. 면책특권 덕에 조사가 더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국민들은 거진 사실로 믿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불세출의 혁명가에서 파렴치한 변태 할아범으로 한동안 위상이 떨어졌었다. 일부 산디니스타 당원들이 그의 전횡에 회의감을 느끼며 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전 부통령 세르히오 라미레즈(Sergio Ramirez)를 필두로 산디니스타 혁신운동(Movimiento Renovador Sandinista)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자신의 부인이 적극적으로 변호한 덕택에 겨우 살아남았지만, 이를 계기로 이미지를 전환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온건주의 노선을 대거 받아들였다. 2001년 대선에서 여론조사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기록할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미국에서 여전히 다니엘 오르테가를 안 좋게 본 건 여전하여 결국 43%의 득표율로 낙선되었고 엔리케 볼라뇨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2005년 엔리케 볼리뇨스가 알레만 대통령 일파의 비리를 잡을려고 했다. (엔리케 볼리뇨스도 나중에 와서 비리혐의가 드러나면서 도찐개찐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알레만파가 이에 반발하면서 탄핵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서 보수정파가 두개로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를 잘 활용하여 알레만파와 제휴하면서 선거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결선투표제를 득표가 35% 이상이고 2위와 격차가 5% 이상이면 당선되는 시스템으로 개헌한 것. 그런데 재집권 후에는 너무 인기가 좋아 쓸데가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6년 대선에서 한때 자신의 적이었던 콘트라의 수장인 하이메 모랄레스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면서 38%의 득표율을 얻어 겨우 당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